소루히칸
연세대 의대 이삼열 명예교수의 평생을 돕는 의사가 되라는 할아버지의 말을 잊지 못해 헌혈운동과 신용협동조합 확산에 주춧돌을 놓았고 승마 경력 70년으로 지금도 주 2회 테니스
이삼열 연세대 의대 명예교수(85)는 평생 의사의 길을 바르게 걸으며 세 가지 외도에도 심혈을 기울인 노의다.
그의 바람기는 의료봉사, 선교, 헌혈운동, 신협 분야 등으로 모두 큰 족적을 남기며 말년에 기쁨을 느끼고 있다.
국내 무의촌 봉사활동뿐 아니라 일본과 대만의 한센병 환자촌도 자주 방문했다.
일본 나환자촌에서는 환자들이 입술로 점자성경을 읽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는 최근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26년간 보건의료 선교활동을 하다 잠시 귀국한 김종윤 선교사(70)를 만났다.
서울 연동교회 장로인 이 박사는 선교위원장을 맡고 있던 1985년 김씨를 우간다로 파견했다.
1989년 세계기독의사회 런던 이사회에 참석한 뒤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에서 4인승 전세기로 420km 떨어진 쿠르바 병원까지 가서 그를 만났다.
전쟁과 내란으로 황폐화되고 에이즈와 풍토병이 창궐한 그곳에서 2박 3일간 지켜본 선교사들의 활동은 감동이었다.
랜드로바를 운전하며 이동 진료를 하면서 구멍 난 수술용 장갑을 끼고 신생아를 받을 때는 안타깝기까지 했다.
이 박사의 헌혈 운동은 1958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모교 임상병리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싹텄다.
당시 세브란스병원 혈액은행 앞은 배고픔을 채우려는 매혈자와 이들을 속이는 야쿠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4·19 직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정보부대 요원이 혈액은행 책임자인 이 박사를 찾아왔다.
“세브란스병원이 먹지 못해 부황증에 걸린 노동자·농민에게 몇 푼 주지 않고 피를 뽑아 부자 보약으로 수혈하고 있다고 평양방송이 보도했는데 사실이냐”고 따졌다.
말없이 장사진을 이룬 매혈인들의 대열을 보이며 이것이 솔직한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이 박사는 1969년 한국헌혈협회 창설에 참여해 민간 차원의 헌혈 운동에 불을 붙였다.
정부 주도로 1975년 대한혈액관리협회가 구성되자 부회장으로 오랫동안 일하며 매혈을 헌혈로 전환시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 박사의 바람 속에는 신협운동이 필수다.
1970년대 임상병리과장 시절 직원들은 가불을 자주 받았다.
매달 반복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싶었다.
신용협동조합은 1849년 독일에서 시작돼 미국 등 전 세계로 확산됐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 가톨릭교회를 중심으로 조합이 만들어졌다.
이 박사는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서민금융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스라엘 협동조합 연구소의 초청으로 신협 운동을 벌이는 데 필요한 교육도 받았다.
우선 세브란스병원과 영동교회에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했다.
65세에 은퇴한 뒤 10여 년간 고문을 지낸 제일병원에도 조합을 만들었다.
그가 학교와 교회, 병원을 설득해 뿌린 협동조합의 씨앗이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비영리 한국신용협동조합으로 결실을 맺었다.
한국신협은 현재 조합원 수(520만 명)와 자산 규모(39조원) 면에서 미국 캐나다 호주에 이어 세계 네 번째다.
함경도 함흥의 부유한 가정에서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19세 때부터 서울로 유학했다.
625전쟁 때 혼자 월남한 어머니와 힘겨운 생활을 하며 할아버지의 소원을 잊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항상 내가 돌볼 테니 돈 버는 의사가 되지 말고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분야를 선택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임상의학이 아닌 기초의학을 선택했다.
요즘도 주 2회 테니스를 즐겼고 15세부터 시작한 승마 경력은 올해로 70년째다.
21일 자택에서 인터뷰를 마친 필자는 시작은 미약했지만 그 끝은 창대할 것이다!
라는 성경 구절을 떠올렸다.
/설희관 <언론인·시인>
[부고] 이삼열(연세대 명예교수) 씨 별세 [출처: 베리타스 알파 2015. 7. 30. ] 최현정 기자
▲ 이삼열(연세대 명예교수) 씨 서거, 이혜련(밝은맘 정신과 의원 원장), 혜석혜미 씨 부친상, 오명준(새하늘청담교회 목사), 김재원 김선종 씨 장인상=28일 오전 1시 20분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 30일 오전 7시, (02) 2227~7556